세기의 위대한 화가_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년 6월 28일~1640년 5월 30일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가 태어났던 당시 중세 후반 유럽 경제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쇠퇴의 길을 겪고 있었고, 스페인의 네덜란드에 대한 신교, 즉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으로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욱 열악한 환경에 있어 과거의 번영된 도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교에 가담했던 루벤스의 아버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족을 데리고 독일의 퀼른으로 피신하게 되고, 1587년 망명지에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와 형과 루벤스가 10살이 되던 해에 고향 네덜란드 안트워프로 돌아오게 된다. 루벤스가 돌아오기 2년 전에 이미 안트워프는 스페인에 의해 함락되었고, 이후 폐허가 된 이 되시는 스페인 통독이었던, 알베르트 대공 부처의 열의로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고 서서히 재생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루벤스가 본격적인 활동을 한 1600년대를 맞아, 안트워프는 부흥이 진전되고 얼마간의 평화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30년 전쟁, 스페인, 영국, 프랑스의 미묘한 관계, 위그노의 반란 등 정치적 동요가 계속 이어지던 시기였지만 안트워프는 그 와중에도 160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다시 활기와 번영을 되찾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가 바로 루벤스가 활동하던 배경이었다.
루벤스는 비록 아버지는 신교였으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과 모국 플랑드르 안트워프를 중심으로 생생한 색채와 생동하는 에너지를 표현하며 독자적인 바로크 양식을 확립하고 대표적인 화가가 된다. 바로크 미술은 종교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교의 반하여 가톨릭 미술과 위상을 회복하고 선전하기 위한 반종교개혁 미술로 웅대한 스케일, 화려한 장식, 연극적인 스펙터클이 그 특징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돌아온 고향에서의 생활을 유복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살았을 때는 그를 신교로 양육했으나 고향의 분위기와 교육을 위해 가톨릭교도로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 1591년 처음으로 풍경화가 토비이스 베르하르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고, 이후 매너리즘 인물화를 제작하던 아담 반 노르트에게서 그림을 배우다, 4년 후에는 당시 안트워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인 오토 판 펜의 제자가 된다. 1598년 루벤스는 안트워프 화가 조합에 등록되고, 이곳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성실히 배웠다. 23살이 되던 해, 루벤스는 당시 모든 화가의 소망이었던 이탈리아 유학을 하러 가게 된다. 이탈리아 유학 중 최초로 머문 베네치아에서 그는 티지아노, 베로네제, 틴토레토 등 베네치아 황금기의 대가들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고 루벤스는 큰 감명을 받는다. 특히 티지아노의 풍부한 색채와 육체 표현은 루벤스 그림의 큰 밑거름이 될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그곳에서 당시 유럽의 영향력 있는 미술품 소장가인 만토바 공 빈첸츠 데 곤챠거에 의해 궁정 화가로 채용되고, 공을 따라간 만토바에서 고대의 우수한 작품들은 접하게 된다. 그곳에서 티지아노, 고레지오, 쥴리오 로마노 등의 작품을 모사하게 된다. 주인 만토바 공의 후원 아래 루벤스는 스페인과 여러 휴양지를 다니는 등 자유로운 행동을 허여받고, 그의 동경의 도시였던 로마서도 오래 머물 수 있었다. 로마는 그에게 성지였으며 또한 고대 조각을 비롯한 명품의 보고로, 고전학과 고대 조각의 연구를 할 수 있었고, 특히 미켈란젤로 작품에서 느껴지는 힘과 장대함에 매료되고, 티지아노의 작품에서는 풍부한 색채와 생명에 사로잡히게 된다.
1608년 안트워프로 돌아온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보여주었던 그이 역량과 명성이 고국에 전해져 귀국과 더불어 그의 그림은 주목받게 되어 끊임없는 그림 주문받게 된다. 귀국 후 그곳에서 궁정 화가로 임명되고, 그 도시에서 손꼽히는 부호이자 좋은 가문의 처녀와 결혼도 하게 된다. 17세기 내내 이어진 종교 전쟁으로 많은 교화와 미술품이 파손되어 이를 대체할 새 작품들이 필요하게 되어 루벤스는 이 시기 제단화와 기독교 주제의 그림을 많이 제작하게 된다. 1614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1610년 [십자가를 세움]은 이 시기의 대표작들이다.
1615년부터 1635년까지 루벤스는 가장 왕성한 제작 활동을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작품 수의 그림을 그리게 되고, 작품에서 그의 활력을 볼 수 있다. 이때의 대표작으로는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의 ??]이다. 루벤스는 유럽 화단에서 제일의 명사가 되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림 주문받았으며 광범한 정치 활동과 지적 교제도 왕성히 하였다. 1622년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를 그려 그의 예술의 접대성을 보여주고 바로크 회화의 위대함과 영광을 잘 나타내었다. 1623년 그의 장녀를 잃고, 1626년에는 부인을 잃는 슬픔을 맞게 되나 그는 더욱 예술에 집중하여 그 슬픔을 극복하게 된다.
이후 1630년 재혼으로 밝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 그의 그림은 부드러우며 건강한 육체, 따뜻한 마음을 지닌 아내의 영향으로 루벤스는 아내를 끊임없이 반복해 그리고 다작의 생명의 기쁨과 신선한 예술의 세계를 보여주게 된다.
이사벨라 대 공비의 죽음을 계기로 루벤스의 정치 활동은 중지되고, 그 후 5년간 그는 자유로운 경지의 걸작들을 제작하다가 1640년 3월 병고를 겪다가 5월 30일 심장 쇠약으로 안트워프의 자택에서 많은 사람의 애도 속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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