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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위대한 미술가

세기의 위대한 화가_렘브란트

by 닌자4js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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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위대한 화가_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년 7월 15일~1669년 10월 4일 네덜란드의 화가) 

사도 바울로 분장한 렘브란트( 자화상, 부분 ) 1661년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당시 카톨릭 종주국이었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칼뱅주의를 국교로 삼는 새로운 신생국 네덜란드로서 탄생을 알렸다. 막강한 해외 무역 국가로 성장하면서 부유한 부르주아 문화를 꽃피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미술에 대한 수요 또한 높아져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종교화 등 광범위한 미술 작품들이 제작되고,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되어 네덜란드는 17세기 미술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단순히 이런 황금기의 화가로 특정하기에는 부족하다. 당시 시대적, 환경적 요소를 넘어 어떤 특정된 시대나, 어떤 특정 지역 ‘그 너머, 그 이상’의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독립 후 제2세대에 속하는 화가이다. 제1세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프란츠 할스가 있다. 할스를 포함한 제1세대의 화가들은 초상화에 있어 매우 개방적인 솔직성을 보였으나 제2세대는 개방성과는 다른 새로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렘브란트는 부유한 제분업자의 6남으로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고전 교육받았고, 이 부분은 도상적인 렘브란트 작품 세계의 풍부함을 뒷받침하게 된다. 1625 년부터 렘브란트는 고향 라이덴에서 초상 화가로서 평판을 쌓게 된다. 이 평판이 계기가 되어 암스테르담의 외과 의사 조합으로부터 집단 초상화 제작의 주문을 받게 된다. 이 주문 화가 유명한 [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다. 
이후 1632년 암스테르담으로 렘브란트는 이주하여, 2년 후 사스키아와 결혼하고 10년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1630년대 말부터 40년대 초에 걸쳐 사랑하던 모친과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 1645년경 역경에서 헤매고 있는 렘브란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고난을 함께 나누었던 헨드리키에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지만 그의 상황은 그리 호전되지 않았다. 1656년 파산하게 되고, 헨드리키에 사망과 아들 티투스마저 죽게 되자, 렘브란트는 자신도 아들은 뒤쫓듯이 사망하게 된다.
렘브란트의 회화적 전개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시기는 1630년까지의 초기, 제2시기는 1650년 전후까지의 중기, 제3시기는 그의 죽음까지의 말년으로 후기이다. 
제1시기에는 카라바지오과 로마파 화가 라스트만의 영향으로 두드러진 명암법과 정확한 동작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제2시기에는 렘브란트의 독창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꽃피우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서 렘브란트는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풍부한 회화적 기법을 구사하게 된다. 
제3시기에는 보다 심화된 렘브란트의 통찰력과 어둠에 가려진 듯한 깊숙한 인간 영혼에 대한 깊은 고찰을 볼 수 있다. 
이 세 시기 중에서 렘브란트의 진정한 에술성을 볼 수 있는 시기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구분을 넘어서, 렘브란트는 인간 영혼의 환시자 이자 동시에 현실과 자신에 대한 관찰자로 평가된다.
렘브란트를 일약 ‘유명 화가 ‘로 도약하게 만든 작품은 [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였다. 이 집단 초상화에서 그는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주어진 테마와 그에 부합되는 표현으로 극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특징은 렘브란트의 대표작 [ 야경 ]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지휘자의 지시에 따르면서도 그 따르는 동작과 위치, 그리고 포즈에 따라 다양한 움직임의 군상도를 그렸다. 이러한 부분은 [ 야경 ]을 당시의 움직임이 거의 결여된 집단 초상화와 확연한 구분을 만들어 주면서 화면 구석구석까지 힘이 배어 있는 걸작으로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화면의 동적인 면을 한껏 더 강조하는 것은 화면 전체에서 전개되는 빛과 그늘이다. 이 두 대표작 [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와 [ 야경 ]이 제작 기간은 10년의 차이가 있는데, 렘브란트에게 30년대는 사랑과 명성, 그리고 부까지 누릴 수 있는 시기였다.
[ 야경 ]이 제작되는 해 1642년부터 렘브란트의 삶에서 비극적인 전환이 시작되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경제적인 위기를 겪어나가게 되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에 집중하여 그의 작품 세계는 더 심화하여 간다. 이 시기의 특징은 렘브란트의 광선의 특이한 취급 방법인 명암법, 즉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합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이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그의 작품 속에서 그려진 대상은 어둠 속으로부터 환하게 비쳐 나온다든가, 또는 반대로 대상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 빛과 그늘의 영혼의 화가 ‘ 라고 불리는 렘브란트의 예술적 본질이 이 시기에 나타나게 된다.
1640년대 이후는 렘브란트에게 역경과 고난의 시기였고, 그는 스스로에 파묻혀 본인의 인간적인 체험을 토대로 한 작품들이 많이 제작된다. 이 시기의 렘브란트의 작품들은 화가로서 원숙한 경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이전에 사용하던 바로크적 구도법을 버리고 자신의 불행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의 선과 약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표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형태화 색채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는데, 색채는 그에게 있어 영혼 표현의 한 방법이었다. 빛깔은 내면에서부터 비친다고 보고, 이런 색채들이 서로 화합하여 상징적인 의미까지 지니게 된다. 1669년 렘브란트가 사망하는 그 해에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데, 이미 늙고 볼품없는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을 얘기할 때 빼먹을 수 없는 부분이 에칭이다. 당시 에칭, 부식 동판화도 초상화처럼 대개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렘브란트에 의해 본격적으로 미술 수단으로 발전하게 되고, 후에 고야를 거쳐 에칭 시대를 열리게 한다. 1630년대부터 주로 성서와 관련된 에칭이 제작되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 마리아의 죽음 ]과 [ 라자로의 부활 ]이 있다. 1640년대는 [ 세 그루의 나무 ]와 [ 환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와 같은 검은 선의 풍요로움과 박력에 찬 생명감이 있는 작품들이 제작된다. 1650년대 이후에는 렘브란트의 에칭 화면은 마치 그의 유채화 화풍이 바뀐 것 같은 성격을 띠는데, 주로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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