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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위대한 미술가

세기의 위대한 화가_툴루즈 로트랙

by 닌자4js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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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위대한 화가_툴루즈 로트랙( 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년 11월 24일~1901년 8월 20일 프랑스화가 ) 

로트랙과 모델


그의 정실 이름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랙 몽파으로 1864년 남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부친과 모친은 사촌지간으로 근친 결혼이었다. 이러한 선례는 이미 당시 프랑스 귀족들과 로트랙 가문에서는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로트랙 가문은 프랑스에서 명망 있는 유수한 가문으로 가문의 선조 중에는 위대한 군인, 프랑스 왕가를 위해 일한 고위 관리들이나,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어머니의 가문 역시 로트랙 가문에 못지않은 유수한 가문으로, 툴루즈 로트랙은 프랑스의 화가 중에서 그 혈통으로 본다면 단연 최고라고 볼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부모의 자랑이었으며 귀한 자제로서 부러움을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1878년 14살에 로트랙은 알비에 있는 로트랙 일가의 오랜 저택 뒤에서 발을 헛디뎌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마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그 몇 달 뒤 어머니와 함께 산책하다가 이번에는 길가의 도랑에 빠져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져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들 때문에 로트랙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기형적인 신체를 갖게 되는데, 보통 성인 남자의 가슴 정도에 작은 키에 큰 머리에는 는 사고모를 눌러쓰고 다녔다. 
1882년 18살의 로트랙은 화가 르네 플랑스드에게서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게 되고, 후에 레옹 보냐의 문하하에 있다가 고흐나 에밀 베르나르 같은 훌륭한 화가들이 있었던 코르몽의 아틀리에서 그림을 배우게 된다.
1889년 제5회 앙데팡당전에서 ‘물랑 드 라 갈레트에서’로 로트랙은 화가로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화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2년 후인 1891년 물랑루즈 라 굴뤼의 포스터를 들고 나타났을 때였다. 이후 그는 10여년간 약 30점의 석판화로 제작된 포스터를 디자인했는데, 이 작품들은 로트랙 개인적으로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석판화가 및 포스터 예술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들이었다.
로트랙은 유화나 석판화를 통해 그가 관찰한 인물의 얼굴과 몸 전체의 가장 특징적인 순간을 스냅숏(크로키와 같이 빠른 솜씨로 그림)으로 포착하여 정확하게 표현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이러한 그의 재능은 동시대의 예술가 중에서 유난히 뛰어났다. 로트랙이 이렇게 대상을 예민하게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뛰어난 소묘력으로 표현하였기에 로트랙의 인물화는 그의 작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강렬한 개성을 볼 수 있다.
로트랙은 동적, 유기적인 면에서도 인공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반대로 정적, 무기적, 자연적인 것들은 그에게 무관심한 부분이었다. 로트랙에게 있어 풍경이란 인물이 풍경의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동시대의 인상파 화가들이 주장하고 제창한 외광화는 본질적으로 그에게 맞지 않았다. 로트랙이 추구한 것은 인상파 화가들처럼 빛나는 태양과 그 아래에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연의 모습이 아니 카페나 극장의 스포트라이트나 가스등의 불빛 아래 희미하게 떠오르는 사람들의 이미지였다. 그래서 로트랙은 후에 그에게 흥미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라는 말하곤 했다. 그래서 같은 [물랑 드 라 갈레트에서]의 주제를 놓고, 르누아르는 밝고 건강한 비전의 그림을 그렸지만, 로트랙은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인지 강한 색으로 운동감과 속도가 있는 선을 사용하여 세기말적인 그늘과 난숙한 분위기를 그이 그림에 표현하였다.
로트랙은 그림을 통해 그의 인생을 이야기했다. 그의 작품은 그의 감정은 적은 일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로트랙은 특정한 주제를 찾아 헤매는 많은 화가와 달리 그의 눈에 ‘제공된' 대상, 즉 그가 흥미를 가진 사람 이외에는 그리려 하지 않았다. 부탁받아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그가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릴 뿐이었다. 그의 작품은 대상을 사진처럼 충실히 베끼는 것이 아닌 순간의 인상에 따라 자신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렸다. 그는 평소에 이야기하듯 데생했고, 그의 시각이 날카롭고 독특해 다른 화가의 작품과 혼동되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개성적인 화가였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시작되기 조금 전부터 로트랙의 그 전부터 있었던 알코올 중독은 더 심해져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 후 그는 부모님의 집에 들어가 어머니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1901년에 그의 어머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37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13년이 지난 그의 작품 중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인정받게 된다.
로트랙은 당시에 세기말에 나타난 파리의 한낱 풍속 화가인 동시에 회화 작가로 평가되었다. 그는 고흐나 고갱처럼 부유한 가정환경으로 이상과 현실적 갈등이나 좌절감 따위는 느낄 수 없었고, 고매한 이상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거나 초연하면서 자기의 인생과 예술을 지켜나가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현실 속의 그대로 그가 보는 것을 그려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봄은 그의 그림에 드러나고, 그에게나 그의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도 오히려 꾸밈없는 진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툴루즈 로트랙을 그 시대상을 가공되지 않은 채 진실을 이야기하는 가장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화가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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