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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위대한 미술가

세기의 위대한 화가_고야

by 닌자4js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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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위대한 화가_고야( Francisco Goya 1746년 3월 30일~1828년 4월 16일 스페인의 화가) 

고야 자화상(부분) 1815년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 y Lucientes)는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 사라고 시 푸엔데토스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1746년 아버지가 도금장을 하는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야는 불리한 출생 조건에도 불구하고 후에 폐쇄적인 상류 사회에서 환대받는 화가가 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알려진 바는 없다. 
고야는 중년에 궁정 화가가 되어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되며 벨라스케즈(Velazquez) 이후 한 세기 안에 등장한 스페인 최고의 천재 화가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야는 혁신적인 사실주의 화가로서 궁정과 대중 사이에서 동 시대인들로부터 열렬히 존경받거나 아니면 철저히 무시당하였던 존재이기도 했다. 이런 고야의 삶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상당 부분 미화되어 구체적인 사실들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1760년 고야는 가족과 함께 사라고사로 이사하여 그 지역의 종교 재단의 학교에서 공부하고 이어 호세 루산(Jose Luzan)이라는 화가에게 기초 소묘 수업을 받게 되므로 화가로서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그후 1763년과 1766년 마드리드로 나와서 산 페르나도 아카데미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두 번 다 낙망하게 된다. 이는 실력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야는 4년 후 이탈리아 파르마 아카데미에 2위로 입학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 마드리드의 아카데미는 실기의 주제가 전통적인 진부한 역사화였고, 고야는 혁신적인 예술을 추구하였기에 서로 취향이 맞지 않을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 시기에 신고전주의의 선구자 멩그스(mengs)와 후기 바로크 화가 티에폴로(Tiepolo)가 스페인에서 새로운 화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야는 이들의 작품에 감명받고 영향을 받게 된다.
1770년에서 1771년에 이탈리아 프르마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1773년 마드리드로 돌아와 결혼하는데 그의 매부가 당시 스페인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선배 화가 프란시스 마이유였다. 프란시스 마이유를 통해 마드리드의 사교계와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되고 왕실 산타 바루바라 타피스트 공장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되면서 궁정 화가로서 일 보 전진하게 된다. 고야는 이 일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스케치의 특성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즉, 스페인의 민족적인 풍속에 자주 접함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확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의 고야의 작품은 준비 단계로 보여지고, 아직 독자적인 예술관은 확립되지 못했다. 그때 궁중 소유의 벨라스케즈의 작품들을 접함으로 큰 영향을 받으며 왕정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열심히 그렸고, 1785년에는 산페르나도 아카데미 미술부의 이인자가 되고 1786년에는 왕실 화가가 되어 평탄한 길을 가다 1792년 질병으로 고생하다 1793년 청력을 잃게 된다. 이 투병 생활을 통해 그는 삶과 주변을 돌아보게 되며 고립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의 세계에 몰두하게 된다. 벨라스케즈의 예술을 통해 고야의 예술 방향 설정에 큰 영향을 받았다면, 그의 질병을 통한 내적 성찰은 그의 예술관을 심화시키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갖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고야의 작품들은 이후보다 세부적 사실이 냉혹하게 묘사되고 충만한 힘과 종교적이고 풍자적인 강렬한 힘이 표현되게 된다. 이 시기에 내적 성찰을 통해 세상을 풍자한 판화 [카프리츄즈(Los Carprichos)]간 나오게 된다.
1793년 질병 회복 후 궁정의 수석 화가로 임명되어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또한 독창적인 작품들도 많이 남기게 된다. 그 당시의 대표작으로는 폭력과 천민을 주제로 하고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띤 [악마와 램프], [마력], [고행자의 행렬], [투우장], [정신병동] 등이 있다. 또한 의도적으로 벨라스케즈의 [시녀들]을 모방하여 평민의 시선으로 본 왕정과 국가의 비전을 보여준 [카를로스 4세의 일가]가 있다. 이 초상화에는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예리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관례로 보여지는 미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나체의 마하], [옷을 입은 마하]도 이 시대의 작품이다. 하류층 여성이었던 마하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종교 재판에까지 회부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과 자유 혁명에 대한 민중의 열망, 그리고 프랑스군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분노와 민중의 봉기에 따른 프랑스군의 잔혹한 보복 살인 같은 정치적 악순환 속에서 고야는 자신의 예술에 대한 반성과 검토를 하게 된다. 그 후 고야의 작품들은 궁정 화가로서의 소극적 태도보다는 본능과 솔직함이 두드러지게 되며 특히, 1810년부터 1815년 사이의 작품들은 이와 같은 강렬함과 격렬함을 담고 있다. [1808년 5월 2일]은 마드리드 민중의 모로코 용병 파견대에 대한 공격을 그렸고, [1808년 5월 3일]은 이에 대한 프랑스 군대의 잔혹한 보복과 총살형을 표현하였다. 이 두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절실하게 또한 사실적으로 나타낸 근대 사회사의 이정표가 된다.
이후 나폴레옹의 실각과 다시 시작된 스페인 군주 정치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새로운 억압을 가져오고, 부인 사망 이후 1819년 만사나레 강변에 있는 흔히들 말하는 ‘귀머거리의 집’을 구입한 후 1820년에서 1822년 사이 고야는 검은 색채의 벽화들을 제작한다. 소위 ‘흑색의 회화’로 일컬어지는 작품들로 공포와 억압을 괴물로 상징하여 표현하고 거친 필치로 그린 표현주의적인 작품들이 나온다. 이 시기의 작품들로는 [ 수프를 먹는 노파], [환상적 비전] 등이 있다. 
1824년 잠시 고야는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다 보르도에서 살다 1828년 세상을 떠난다. [보르도의 우유 짜는 여인]이 이 시기의 작품으로 인상주의적 색채가 엿보이며 주목되는 작품이다.
고야는 이른바 혁신적인 사실주의 화가로서 표현주의에 가까운 작품들의 화가였다. 작품에는 궁정 화가였으나 그 내면에선 왕실과 귀족들이 불편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진실을 표현하고 하였다. 그 진실의 원천은 인간이었다. 특정 인간이 아닌 인간 전체의 보편적인 부분 부유한 자, 가난한 자, 권력자, 피 권력자, 죽이는 자, 죽는 자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후세에 많은 영향과 교훈을 남기게 되고, 특히 낭만파의 거장 들라크루아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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