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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서양 미술사#7: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시작_다리파와 추상미술, 비대상적 회화의 시작

by 닌자4js 2023.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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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의 시기별 구분: #7_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시작_다리파와 추상미술과 비대상적 회회의 선구자, 칸딘스키

 

바실리 칸딘스키, [콤보지션VII을 위한 스케치 I], 1913년

 

15) 다리파 (Die Brucke):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예술 단체

야수주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은 독일, 그중에서도 특히 다리 파(Die Brucke)라고 불린 협회의 회원들로 1905년 드레스덴에 살고 있던 일군의 동지적 화가들이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로틀루프, 에밀 놀데, 막스 베크만 등이 있다. 자신들의 혁명적인 정신과 내적 자아를 작품에 반영하였다. 고갱, 고흐 그리고 뭉크에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그들의 초기작품, ,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의 [거리]는 마티스의 단순화된 운동적인 선과 화려한 색채를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반 고호와 고갱의 직접적인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는 독일 표현파에 많은 영향을 준 뭉크의 요소들도 보인다. 다리 파의 화가의 한명인 에밀 놀데는 고립된 존재로, 루오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었으나, 표현의 명확성 면에서는 루오에 미치지 못했다. [최후의 만찬]의 두텁게 물감을 바른 화면, 꾸며 낸 것 같은 치졸한 묘법 등은 고갱에게서 자극을 받은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을 좋아한 나머지 놀데가 회화적 세련을 일체 포기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1913년에 작가들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생기고 결국은 서로 각자의 노선을 가게 되어 다리 파는 끝을 보게 된다. 그러나 다리 파는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고, 다음 세대의 차세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다리 파의 후계자인 막스 베크만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문명에 대한 깊은 절망감으로 표현주의로 전향한 후, []과 같은 작품에서는 사람을 조롱하는 듯한 악몽, 인형 같은 인물로 꼭 채워진 지그재그의 세계를 보여준다. 베크만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의 혼란을 나치의 탄압을 못 이겨 고국을 떠날 때 그린 세 폭의 그림 [출범]을 통해 그의 상상력과 그를 사로잡고 있는 인간상들을 표현했다. 베크만은 이 그림을 통해 진보의 시대에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무력한 존재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 세 폭의 작품에는 절망적인 분위기의 팔다리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의미도 없는 의식들로 채워진 위아래가 전도된 장면이 양쪽 좌우의 패널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중앙 패널에는 파란 바다와 태양이 밝게 비치는 장면을 그림으로 바다 건너편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나치 점령 하의 네덜란드에서 가장 쓰라린 환경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베크만은 미국으로 가게 되고 그의 마지막 생애 3년을 그곳에서 마무리하게 된다.

 

16) 비 대상적 회화_ 추상 회화의 시작,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출신의 독일 활동 화가)

한편 독일에서는 러시아 출신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가 야수주의를 뛰어넘어 가장 대담하고 독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서청기사라고 불린 뮌헨 미술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0년 이후 칸딘스키는 대상의 재현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는 무지개 같은 색채와 파리의 야수파 화가들의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인 표현으로 완전히 비 대상적인 양식을 창조해 내었다. 이른바 추상 미술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작품의 제목들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이었는데, 그의 작품 중 [컴포지션 VII를 위한 스케치 1]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때론, 오해를 피하기 위해 칸딘스키를 위해 ‘추상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칸딘스키를 눈에 보이는 실재의 형태를 분석하고 단순화시킨 화가로 흔히들 간주하고 하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는 실재의 형태를 분석하고 단순하여 표현한 것 아닌, 전적으로 무의식적인 비 대상적인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칸딘스키의 의도는 물질세계와 유사한 일체의 것을 배제하고, 형태와 색채에 순수하게 정신적 의미를 담는 것에 충실히 하고자 하였다.

칸딘스키는 그의 작품의 초기에 야수파, 특히 루오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영향을 깊이 받았고, 점차 대상의 재현을 포기하면서 음악과 철학을 작품에 반영하게 된다. 특히 회화의 음악적 유상성을 추구하여 많은 작품에 표현하였다. 비 대상적 회화에 음악적인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후기에는 그의 작품에는 원이 가장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나 여전히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고 감정적인 색채로 채워져 있었다. 

칸딘스키는 대상의 재현을 벗어나 선명하고 다양한 색채와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으로 음악을 그의 그림에 반영함으로 자유롭고 역동적인 추상 회화를 구현하여 현대 추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후, 비록 우리는 비대상 파 화가들의 현실 재현적인 그림을 비예술이라고 반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가가 무엇을 표현하였는가를 확실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감정의 눈부신 신선함이 있음을 부정하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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